YMCA 회관


장시간의 비행 후 JFK 공항에 내리자 감개무량했다. 일단 외국인 천지였다. 무엇보다 후즐근한 티셔츠에, 빨갛고 거대한 챙 모자를 쓴 프랑스 여학생이 나를 맞아준다는 자체가 무척 설레였다. (여긴 미국인데!) 브라질 남자애도 있었는데, 옆에 독일 남자애와 통성명을 하는가 싶더니 "너 축구 좀 아냐?" 로 시작해서
두시간 내내 입에 거품을 물고 축구얘기만 하는 축구 오덕후의 면모를 보였다. 그를 보고 '아, 개개인이 국가 이미지를 좌우하는구나.'하는 심오한 생각이 들어, 행동거지를 좀 더 사려깊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곧이어 우리는 중고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어디론가 향했다. 행선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봐도 내귀엔 목적지가 자꾸 "할램Harlem"이라고 들려서 불안했다. 나 아폴로 극장 청소부로 팔려가는거 아닌지...


다행히 난 할램에 있는 YMCA 회관에 당도했다.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하지만 비가 부슬부슬 오고, 쇠철장이 두 겹이나 있고, 경비원의 인상이 무척 험악한 이 회관 주변은 무척 무서웠다. 게다가 회관 안에는 쇠로 된 이층 침대가 있는 방이 여럿 있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한국인 지원자들 일행들을 다시 만나 안심했고, 그리운 한국말을 조금 내뱉으며 불안감을 던져버렸다.

무슨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숙소


다음날은 예정대로 오리엔테이션이었다. 한국 지원자들의 지원서를 미국 YMCA로 보내면, 그곳에서 미국 각 지역의 캠프장으로 지원서를 보내고, 그곳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승인서를 보내는데 지원자들은 모두 이 회관에서 그 승인서를 받게 되어 있었다. 승인서는 우편으로 계속 오고 있었고 우리는 캠프송을 배우거나 주의사항을 듣는 등 친철한 교육을 받고 나라별 소개 시간을 가졌다.

승인서를 받고 있는 세계 각국의 지원자들


여기선 세계지리부도에서 한번 볼까 말까한 국가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장기자랑을 하는데, 루마니아인들은 남여가 어울려 전통춤을 추기도 하고, 프랑스는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주겠다면서 자국어로 토론쇼를 해서 모두를 당혹하게 하였고, 미안하지만 이름을 못외운 어떤 나라에서는 전통 음식을 조금씩 나눠주기도 했다. 한국은 뭐했냐고? 우린 337박수와 함께 오필승 코리아를 화끈하게 외치고 당시 국내엔 유행이 한참 지났지만 외국인들은 전혀 모르는 오필승코리아 춤을 췄는데, 열정적이고 인해전술(한국인 지원자가 두번째로 많았다)로 밀어붙인탓에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나는 맨 앞에서 각시탈을 쓰고 했는데 덕분에 외국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진걸 잘 볼 수 있었다.

담소를 나눴던 루마니아, 대만 지원자와 함께


무려...음식이 쌓여있다!


이런 여러가지 일정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곳의 사과이다. 빨간것이나 녹색이나 할 것 없이 사과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지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사과와는 맛이 판이하게 달랐다. 촌스럽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미국에서의 첫 점심 도시락


점심시간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시간이 남아 용기를 내서 할렘을 조금 돌아
보기로 했다. 건물 밖에는 흑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고 나를 일본원숭이 보듯 신기하게 쳐다봤다.
이 할램 동네는 빨간 벽돌건물과 흑인들만의 세계였다. 생전 처음 흑인만 있는 동네를 와서 주눅이 들었지만 아폴로 극장이나 콜롬비아 대학을 볼까 하고 조금 걸었다. 하지만 곧 공중전화마다 박살나있는 것을 보고 얌전히 회관으로 컴백했다. 회관에는 내 승인서가 와 있었고, 나를 원하는 캠프장은 뉴욕에서 멀고 먼 곳이었다.